새로움과 익숙함 사이,를 걷다
2년차. 대개의 일이 그렇듯 <영화, 소(疎)란(LAN)> 역시 2년차의 장단점을 겪고 있다. 참여자 대부분이 전체 과정을 어떻게 진행되는지 흐름을 알기에 여유롭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이 새롭지만은 않기에 설레는 마음이 덜하다는 것은 단점이다. 참여자와 교사들 사이에 수업의 시작부터 약간이나마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장점이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가져야 할 긍정적인 긴장이 약해지는 것은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명료하지 않은 경계선은 교사 역할로서 언제나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어느새 설렘도 기대도 없이 익숙하고 무료한 기능의 반복으로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란>은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2년째 시도하고 있는 미디어교육 프로그램이다. 아,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경계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놓고 현대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함께 돌아보고자 하는 영화제이다. <영화, 소란>은 인천을 삶의 공간으로 갖고 있는 다양한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 드러내고 더 많은 경계인들과 만나려고 한다. 올해는 다문화사랑회 새꿈학교, 한국인천화교중학 청소년, 아이다마을 사이렌, 베트남예술단 무지개언덕 이렇게 4개 팀과 함께 하고 있다. 3회였던 작년에는 베트남 청장년, 화교청소년, 국제결혼 2세 청소년, 중도입국 중국청년들과 함께 생활 속 이야기를 찾아 영화화했다. 자화자찬일 수 있지만, 작년 <영화, 소란> 상영회 자리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영화 속에 담긴 이야기들의 진정성과 친숙함은 함께 했던 관객들에게 깊이 다가갔고, 영화를 만든 이들은 화면 안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관찰당하는 사람이 아닌 주인공으로 반짝였다.
물론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참여자들과 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위한 관계 형성에 필요한 시간, 영화적 완성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한 장비와 노력, 상영회에서 단순한 주인공을 넘어 주인으로 자리하기 위한 참여자들의 대화와 준비 등. 굵직굵직한 것만 떠올려도 아쉬운 점은 많다. 올해 <영화, 소란>을 준비하면서 작년에 아쉽게 여겨졌던 부분을 조금 덜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앞서 말했던 것처럼 혹시라도 빠질 수 있는 2년차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수다를 나누고 싶었다. 흔히 영화를 만드는 교육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보통은 카메라를 만지거나, 연기를 하거나, 폼나게 “레디 액션!”을 외치는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우리 교사들이 제일 앞세우는 건 ‘수다’ 그 자체다. 경계 없이, 금기 없이, 소외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떠드는 수다, 이 수다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꿈에 그리는 영화제작 교육프로그램의 이상이다.
일상에서 영화는 오락 혹은 예술로 접근된다. 맞다, 영화는 오락이거나 예술이거나 혹은 그 둘 다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오락을 돈과 시간을 들여 소비하고 치워버리는 것쯤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술을 평범함과는 동떨어진 난해한 그 무엇, 특별하게 예술가라 지칭되는 이들의 고독한 작업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영화제작 교육프로그램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니, 적어도 <영화, 소란>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누군가의(혹은 누구나의) 삶에서 꼭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를 잘 다듬어 전하는 놀이며, 미디어며, 예술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듣고, 말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일이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오락이 되고 예술이 된다.
영화제를 한 달도 못 되게 남겨둔 현재, <영화, 소란>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5개 교실 모두 촬영을 갓 마쳤거나,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곧바로 편집과 함께 4개 국어로 대본 번역을 시작한다. 상영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전 준비를 위한 참여자 워크숍도 예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한창 바쁜 와중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의 3개월을 돌아보는 것을 잠시 미뤄두고 있다. 목표로 삼고 있고, 중요한 원리로 삼고 있는 것들을 잘 지키고 있었는지, 작년에 아쉬워했던 일들은 얼마나 보완했는지, 올해 참여자들과 잘 만나고 잘 떠들었는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거들었는지. 영화제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교사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고, 참여자들과 함께 확인하려고 한다.
나는 <영화, 소란>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의 프로그램 참여자를 넘어서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주인공이며, 주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사실 작년 영화제를 마친 이후로 올해 초까지 무엇보다 아쉬웠던 건, 참여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면서 함께 하는 모두가 <영화, 소란>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길을 닦지 못했던 일이었다. 앞으로 남은 한 달, 4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잘 준비해서 치르고 나면 올해는 꼭 내년을, 세 번째 <영화, 소란>을, 5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향해 빠르되 탄탄한 걸음을 걷고 싶다.
글 / 여백(사회적협동조합 인천여성영화제 교육전문위원)
사진 / 영화, 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