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문학과 연극 사이, 낭독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묵독이 일반적인 시대에 소리 내어 읽는 ‘몸의 행위’로 책 읽기의 새로운 감각을 알리고자 제작됐죠. 2003년에 처음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글자를 침묵 밖으로 끌어내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게 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요즘 문학과 연극계에서 낭독이라는 새로운 극형식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연극계에서 낭독은 개막 전에 작품을 미리 공개하는 리딩 공연으로 선보였습니다. 연극 제작 전 투자자를 찾기 위한 쇼케이스나 홍보용이었죠. 문학에서도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을 강조하지만, 작품이 낭독의 형태로 소개되는 일은 드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작품을 만나는 시간. 낭독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파편화된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자 없이 구어만 존재하던 시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의 모양새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낭독극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세트는 치우고 배우와 대사만으로 ‘생각하는 희곡’을 추구합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을 찾아가는 거죠. 빠름을 강조하는 디지털 시대에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되새기는 낭독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낭독극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한 장면
출처:파이낸셜뉴스
“텅 빈 무대 위에 대본을 든 배우들만 덩그러니 있다. 다른 그 무엇보다 대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함이 흐른다. 적막을 뚫고 관객까지 달려가는 배우들의 언어는 날쌔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 빈 공간에서 관객들은 상상의 유희를 펼친다. 듣는 희곡의 즐거움을 새삼 느낀다.” (‘극장, 낭독에 빠지다’ 중에서)
<낭독 독서법>을 쓴 진가록 작가는 “낭독은 하나의 선포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인생에 가로놓인 벽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낭독을 하면 책 속 인물에 감정 이입하기 쉽다고 합니다. 목소리의 울림, 색깔, 진동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낭독뮤지컬 ‘파리넬리’ 한 장면
출처:위클리공감
낭독+연극뿐만 아니라 낭독+뮤지컬도 있습니다. ‘파리넬리’는 뮤지컬 제작사 HJ컬처가 기획한 ‘낭독뮤지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마리아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배우가 노래하고 편지를 읽으며 극을 이끕니다. 무대에는 동그란 단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피아노 한 대가 전부입니다.
18세기 최고의 카스트라토(변성기가 시작되기 전 거세해 소년 시절에 지니는 고음역을 유지하는 가수)였던 파리넬리. 극은 신이 내린 목소리를 지닌 동생 파리넬리와 불멸의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형 리카르도가 주고받은 편지를 테마로 진행됩니다. 사건보다 내면에 집중하게 하는 낭독의 형식을 극대화했죠.
‘파리넬리’의 프로듀서인 사노 아유미는 “스마트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펜을 들고 편지지를 보며 오랜 시간 고민한 마음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시각보다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배우들도 의상과 분장보다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제작비가 줄어드니 흥행 부담도 줄고, 관객도 온전히 노래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도 낭독극의 장점입니다. 이는 티켓 값에도 영향을 줘, 관객들이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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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문학 사이에 위치한 ‘낭독극’을 미국 뉴욕의 맨해튼 오프브로드웨이나 대학가에서는 ‘스테이지 리딩(Stage Reading)’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읽어주는 낭독극이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기를 소재로 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하여 두 남녀의 만남에부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과 그때의 감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냉장고 위의 인생’은 냉장고에 붙여진 쪽지를 이용해 엄마와 딸의 마음을 들려줍니다.
출처:명랑캠페인
지난여름에는 소설가 윤고은의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이 공연됐습니다. ‘1인용 식탁’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점심을 먹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프로젝트 그룹 ‘키르코스’ 배우들이 낭독극으로 만들었죠.
유시민 작가의 1988년 등단작인 중편소설 <달>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군대의 고문관이라 불리는 주인공 김영민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사와 군대 경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등을 담은 작품입니다. 공연기획사 후플러스가 진행한 ‘2018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죠.
입체낭독극 <어쩌면>과 <웃는 동안> 출처:명랑캠페인 |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살아가던 ‘나’의 죽음이 친구들에게 알려집니다. 전화를 받은 성민은 영재를 찾아가고, 라면을 먹던 영재와 함께 화장실에서 꼼짝 않는 민기에게 소식을 알리러 갑니다. 펑펑 울며 통곡할 줄 알았던 그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멋진 양복을 사러 가죠.” 소설 <웃는 동안>의 내용입니다.
<어쩌면>에는 나, 압정, 라디오, 거울 네 명과 소설책을 읽고 있는 또 다른 배우가 등장합니다. 네 명의 소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죽은 이들의 말과 행동을 재연합니다. 작가가 쓴 따옴표 하나, 괄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가죠. 연극과 소설의 경계를 잊은 관객들은 무대 너머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입체낭독연극<어쩌면>과 <웃는 동안>은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텍스트로 합니다. 독자가 만들어낸 수만, 수천 가지의 느낌들은 모두 다르기에 수많은 해석이 존재합니다. 가만히 앉아 읽기만 하는 낭독극과 달리 책상 위를 오르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손짓·발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입체낭독연극입니다.
출처:위클리공감
지난 9월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낭독음악회에서는 이육사, 도종환, 박용재, 이원 시인의 작품이 낭독됐고 신촌, 합정, 연희동에 자리 잡은 독립서점과 카페에서는 때때로 시인의 낭독회가 펼쳐집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읊기도 합니다. ‘밥 딜런 낭독회-샷 오브 러브’에는 대중음악평론가와 시인, 뮤지션 등이 함께했네요. 시인이 시적인 가사를 소개하면 뮤지션이 직접 밥 딜런의 노래를 들려주는 거죠.
출처:원주시 공식 블로그
소설 토지의 날은 박경리 선생이 26년에 걸친 집필 기간 끝에 5부 20권 분량의 토지를 완간한 기념으로 해마다 8월 15일에 열립니다. 소설 토지 1부 첫 장면이 1897년 8월 15일이고, 토지의 마지막 장면도 (1945년) 8월 15일, 토지 완간일은 (1994년) 8월 15일이고, 박경리 문학의 집 개관 역시 8.15가 붙은 2010년 8월 15일입니다.
해마다 시 낭송 대회, 토지 명장면 따라 그리기, 물통에 감동 메시지 남기기, 토지 한 문장 쓰기, ‘토지’ 속 등장 인물에게 편지쓰기 등의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 처음 ‘박경리 소설 낭독공연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예선을 치른 뒤 본선에 오른 네 팀이 박경리 문학의 집 공연에서 열연했고, ‘설화’, ‘불신시대’ 같은 박경리 소설을 낭독극으로 선보였습니다.
출처: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의 목요낭독회가 올해로 3년째 진행됐습니다. 참여자들은 3개월간의 연습 끝에 지난달 낭독극 <뷰티인사이드>를 공개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낭독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1. 예스책방 책읽아웃
매주 목, 금요일 방송된다. 오은 시인이 진행.
2. 알라딘의 서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된다. 신간 중 추천하는 책 4권을 낭독.
3. 낭만서점
매주 화요일 한 편의 소설을 선정해 들려준다. ‘세계문학 읽기’ 코너에서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와 배우 김성현이 매월 두 편의 세계문학 고전을 선정해 낭독.
글 · 이미지 이재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눈이 아닌, 말과 귀로 책을 읽는다! 낭독의 매력
위클리공감, 2018.8.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소설 『土地』 완간일, 8월 15일 ‘소설 토지의 날’
네이버 블로그(이슬마루), 2018.8.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명랑한 낭독, 팔딱거리는 소설 <웃는 동안>
네이버 블로그(명랑캠페인), 2017.9.1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낭독’의 시대, 뮤지컬과 소설의 그 중간지점
브런치(서정준 JJ), 2018.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삶을 바꾸는 ‘우리말 낭독’의 힘-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충청매일, 2017.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극장, 낭독에 빠지다
파이낸셜뉴스, 2014.2.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