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loo Castle Site at Fukuoka 3

이번 연재는 후쿠오카에서 처음 열린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전시와 인천재단의 후원이 함께하여 마이즈루 공원에서 열린 ‘얄루 성터(Yaloo Castle Site)’ 전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나누려고 한다.

 
네브래스카 시티 길거리에 쌓여 있는 옥수수 더미   산책 중 찍은 사진
 2017년 봄에는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보냈다. 길거리에는 사람보다 주차된 형형색색의 개인용 트럭이 많았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마른 옥수수 더미를 거대하게 형성하는 곳이었다. 이슥해질 무렵 도착한 후쿠오카는 별천지였다. 수많은 관광객이 바쁘게 지나가고 현지인들의 편의와 욕구를 자극하는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가 익숙하지만 신선하고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녁에 도착해 집 앞 지하상가로 장을 보러 갔는데 약국과 슈퍼마켓의 입구가 연결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약국을 통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약국에는 자극적인 삽화와 사진으로 무장한 갖가지 피부미용 상품들이 약보다 더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신기하게도 여드름 관리제가 부위별로 있었다. 많은 상품 패키지에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재미있어 한참 동안 살펴봤다.

 
사과, 유자레몬 콘셉트 모델링

미로처럼 설치된 진열대를 지나자 슈퍼마켓 입구가 나왔다. 입구부터 완벽하게 흠집 없는 형태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과일이 종류별로 분리돼 낱개로 포장돼 있었다. 네브래스카에서는 상처 가득하고 못생긴 사과들이 포장되지 않은 채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표면에 드러나는 욕구와 그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일상적인 소비공간에서 표출된다는 게 재미있었다. 이 경험이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의 소재가 됐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협업 회의 중

사과와 딸기·유자·복숭아·매실 등 보편적인 과일과 여드름, 머핀톱 등 미용 관심사를 연결지어 VR을 통해 3D 로 조형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쇼핑공간을 놀이공원에 비유해 표현했다. 규슈상교대학교 조형학과와 협업해 프로젝션용 나무 스크린을 짰다. 전시장 입구에서 도장을 찍고 동전을 받아 입장한다. 전시내용을 예견하는 비디오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각 과일 영상이 대형 과일 모양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설치 사진

과일점 뽑기 캡슐에 들어갈 스티커

모든 3D 애니메이션은 VR을 이용해 제작됐다. 딸기코에서 화이트헤드와 블랙헤드가 끊임없이 차오르고 유자에서 여드름이 터져 나온다. 각 영상에서 특유의 과일향과 음향이 함께한다. 모든 사운드를 후쿠오카 출신 프로듀서 시노스케 마쓰미 (Breezesquad)가 담당했다. 전시 끝에는 입구에서 받은 동전으로 뽑기 머신을 사용한다. 캡슐 안에는 미래 과일·피부미용점을 쳐 주는 과일실이 들어 있다. 본래 미니어처 과일 토이를 만들려고 했으나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 아쉽게도 스티커로 대신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 사진

이번에 처음으로 대형 스크린 제작이 필요한 작업 일곱 점을 한 번에 전시했다. 분업을 위한 전시 도면을 처음 그려봤다. 재료비를 줄이기 위해 미술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과일 스티커 수백 개를 직접 자르기도 했다. 레지던시 팀의 신뢰와 희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인 작가로서 평생 남을 귀중한 경험이다. 이 지면을 빌려 한 번 더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전시 기간은 짧았지만 다행히 관객이 많이 다녀갔고 좋은 피드백을 얻었다. 이 경험을 통해 2018년 벚꽃축제와 함께 열린 후쿠오카성재건축 기념 아트전에 참여하게 됐다.

 
얄루의 콘셉트 포스터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시 안내서와 출입증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이즈루 공원 후쿠오카성에 직사각형 형태의 방이 낮고 좁게 일렬로 이어져 있다. 내가 입구부터 방 일곱 칸까지 전시를 하고 일본의 오카모토 미쓰히로 작가가 뒤를 이어 작업으로 전시를 한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를 공간에 맞게 변형하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유적지나 캐슬을 소재로 작업하고 그 건물 안에서 전시할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새롭게 작업하기로 했다.

후쿠오카성 전시장 외부 풍경

 
설치하러 가는 길에 만난 벚꽃을 이와모토 큐레이터가 감상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커스텀 제작한 프로젝터 마운트를
마츠라 큐레이터가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있다.

후쿠오카 성에 처음으로 답사 갔을 때를 떠올려 본다. 같은 모양의 방이 일렬로 이어져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건물 형태가 시간 흐름과 닮았다. 과거에 지어진 성은 시간 흐름의 증거이자 현재와 과거를 잇는 관문이다. 유적은 과거의 한 조각이면서 미래의 파편이기도 하다. 후쿠오카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시간의 파괴성과 영속성을 함께 내재하는 역설이 재미있다. 과거 속 후쿠오카성의 전성기를 상상하면서 내가 없을 미래 세상의 이 유적지를 투영해 본다. 그 유적지 속을 걷고 있는 내 먼지 같은 서사와 옥수수 알보다 작은 소우주도 투영해 본다. 후쿠오카에서 분야마다 다양하게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구체화된 질문 중 하나인 시대서사와 개인서사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고민을 유적과 시간 역설의 틈새를 벌려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조심스럽고 명량하게 표현해 보기로 한다.

 
스튜디오에서 카마치,마츠라 큐레이터와
프로젝션 시험중
  전시팀과 안전모 테스트 셀피

2017년 여름 후쿠오카에서의 시간을 전시 공간 속에 펼쳐질 소우주의 경계로 삼고 기억의 파편을 비디오 조형의 형태로 빚어 투영(projection)하기로 한다. 대체 우주로의 입장을 예견하는 성곽의 문과 바닥에 떨어진 샹들리에, 고장난 텔레비전 타워 탑 시리즈 등 지난 연재에서도 다양하게 조금씩 다뤘던 경험과 소재들을 섞어 살아 숨 쉬는 상상의 유물로서 비디오 조형 시리즈로 표현했다. 인천재단 지원으로 가능했던 마지막 방에는 VR 체험 전시로 관객들이 앞서 경험한 상상유물들이 부유하고 있는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전시 정황과 설치 사진은 다음 연재에 더 소개하겠다.

전시팀 퇴근길 야마키, 마츠라, 카마치 큐레이터

글·사진 / 얄루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