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예술의 선구자, 전석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나다
같이 노래 부르는 사람들 ‘sing along’
sing along(싱어롱, 같이 노래 부르기).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sing along은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듣던 말이었다. 교회에서 주로 들었다. 복음성가를 함께 부르는 시간,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기를 다뤘고 함께 노래하며 간단한 율동도 하는 시간이었다. 비단 교회뿐 아니라 학교나 사회에서도 종종 sing along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니 부담이 없었고 다 함께 아는 노래여서 더 좋았다. 그게 왜 좋았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시간에 우리는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로 시작하는 ‘실로암’을 불렀고, ‘가방을 둘러맨 어깨가 아름다워…….’ 라고 시작하는 노래나 ‘조개 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같은 후크송들을 신나게 불렀다. 국민가요라고 불리진 않았지만, 그 시대를 거친 사람들 대부분은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그 노래들을 다 배운 것일까?
오랜만에 그런 자리를 보았다. 인천음악플랫폼 1층에 나이 지긋하신 분들 50여 명이 모여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앞에서는 전석환 선생님께서 키보드 하나를 가지고 노래 부르기를 이끄셨다. 노래는 대부분 짧고 알려진 노래였고, 모두 따라 부르기에 쉽게 큰 글씨의 악보로 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여성들이 많다며 키를 낮게 조정해주기도 하셨고 잘 모르는 노래는 좀 틀려도 된다고 하셨다. 익숙한 노래들은 후렴을 반복하거나 빠르기를 조정해 멋있게 마무리하기도 했다. 종종 화음 소리도 들렸다. 모두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고 평화로웠다.
인천음악플랫폼에서 열린 <sing along, 인천> 공연
sing along의 처음, 전석환
전석환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몇 개를 미리 읽었을 때 내가 접한 정보는 sing along을 만든 사람이라는 설명이었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에 감명을 받아 많은 사람과 함께 노래하는 운동을 하셨다. 통기타 하나 들고 많은 사람과 노래를 했다. ‘좋은 노래’를 불러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으셨던 선생님은 군부대, 학교, 방송을 통해 좋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에 집중하셨다.
” 체육회에서 얘기하지만, 생활체육이 성공했잖아요. 체육생활 타이틀을 생활체육으로 바꿨거든요. 내가 얘기하는 게 오늘 이거야. 생활 음악을 하라는 얘기야. 음악 생활이 아니라. 신앙도 생활신앙을 하라는 거예요. 신앙생활 하라고 하지만, 난 그런 말을 안 써요. 목사님에게 바꾸라고 말하죠.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을 할 수 있도록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하죠. 문화예술인들한테도 자꾸 생활 속에서 들어간 작곡을 하라고 하죠. 노래를 불러도 따라부르기 어려운 노래는 갈 때가 되었다는 거야. “
누군가 잘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생활예술은 우리가 처음 발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활체육에서 영감을 얻어 생활예술이라는 단어를 생각한 것처럼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 분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오신 분을 만나게 된 것이 기뻤다.
2018.10.18 <sing along> 공연을 마치고 전석환 선생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현된 노래부르기
“공개방송하면 찬조 출연(게스트 공연이 있는게)하는 게 단일지사거든요. 근데 나는 다 함께 노래하거나 삼천만이 합창하는 거지. 누구 한 사람만 독창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학교나 직장에 가면 직원 중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데려다가 마이크 주고 같이 부르게 하기 위한 게 목적이지. 누군 혼자 남아서 솔로 부르고, ‘와, 잘한다’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게 찬송가에서 얻은 거야. 교회에서는 예배가 기도와 찬송, 설교인데요. 그중에서 찬송을 무시하는 목사들 많은데, 이거는 내가 일본 가서도 얘기했지만, 찬송을 열심히 하는 교회는 잘 돼요. 단합이 잘되거든요. 공동체 의식이 좋아지거든. 그런 거를 어렸을 때부터 터득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에서 연극을 하거나 청년들이 뭐 한다고 하면 나는 솔로를 안 시켰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창영교회에서 성가대 지휘할 적에 4시간 전곡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중 헨델의 메시아에 솔로 부분이 있지만, 나는 솔로를 안 시켰어. 소프라노 파트도 전부 같이 불렀죠. 어떻게 보면 좀 이단적인 행동을 한 거예요.”
내가 인터뷰 당일 목격한 노래 교실에서도 그랬다. 모두 즐겁고 편하게 부르는 노래로 1시간이 꽉 채워졌다. 절대 가르치지 않았고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리더’이기를 바라셨다. 리더는 ‘인도자’이지 ‘지도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인도자가 되어 sing along 시간을 편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도 끊임없이 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통기타를 치는 것을 이단시 해왔지만, 그는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신디사이즈도 처음으로 도입했다. 교회나,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들은 선생님의 그런 행보를 싫어했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나쁜 악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노래가 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 어떤 악기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생활문화가 통기타, 오카리나, 우쿨렐레, 하모니카 등 대학에 전공이 없는 악기로부터 시작했고 공예도 캘리그라피, 바느질, 뜨개질 등에서 시작되었다.이처럼 우리는 고급문화 저급문화를 구분해 저급문화를 ‘아마추어’ 또는 ‘예술적인 것이 아닌’ 것들로 취급했었다. 그러나 생활예술이 부상되면서 그런 경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전석환 음악가 인터뷰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 장충체육관에 전국대회로 사람들이 모였어요. 거기서 독창곡 <보리밭>을 시작하는데, 옛 생각이라는 노랫말에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온 거예요. 이 장충체육관이 뜨는게 아니라 내 몸이 뜨는 것 같았어요. 옛 생각에서부터 음이 올라가는데 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니까요. ···(중략)··· 그게 슬로우 락이라서 소리만 크게 부르면 딱 뭉쳐지거든. feeling이 부딪히는 게 아니라 꼬아지니까 이건 무서운 거야. 내가 거기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막 신나게 부르는 게 아니고 슬로우 락이라서 감정 세계가 느껴졌어요. 그게 묶어지면서 꼬아지는 거죠. 내가 그래서 핵폭탄이 터져도 그건 부서지지 않을거 라고 얘기를 했어. 노래가 그만큼 무기보다 무서운 거라고. ···(중략)···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감동을 하듯이 그런 데서 오는 엔도르핀은 대단하죠. 그건 돈 주고도 못 사고 의학적으로도 해석을 못 해. “
인터뷰하기 전에 전석환 선생님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다. 그는 군인 출신이기도 했고, 클래식 전공자였다. 이북이 고향이었고, 월남해서 조국을 위한 일에 관심이 많았고, 군대, 새마을 운동 등 관 주도의 일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한 그분의 역사가 나와 너무 달라서 혹시 말이 통하지 않거나 너무 다른 생각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화하면서 그 걱정은 없어졌다. 오히려 나는 생활예술을 가르쳐 주실 선배님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술이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라고 평생을 피력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좀 더 대중적인 악기를 도입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노래 부르기를 원했던 그는, 예술이 주는 감동을 되도록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오랜 노력 때문에 지금 생활예술이 공론화 되는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그의 ‘함께 노래 부르기’는 지금 ‘누구나 어디서나 예술하기’로 발전했고, 통기타와 신디사이저의 실험은 우쿨렐레, 오카리나, 하모니카가 되었다. 그의 원칙이었던 ‘좋은 노래, 부르기 쉬운 노래’는 아직도 우리의 숙제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늘 자신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예술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시대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 것이다.
인터뷰 진행 정리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 사무처장 최경숙
사진 / 정책연구, 개항장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