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적으로 콘텐츠 기획 역량을 갖춘 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청년 문화기획자 <화수분 제작소> 인터뷰
바쁜 일상에서 한해를 되돌아볼 때가 있다. 주로 계절이 변하거나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이다. 그리고 어떤 막중한 과제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을 때가 아닐까?
무더운 여름이 막 지나가려는 9월 초에 <화수분>팀을 만났다. 첫 기획으로 선보일 ‘인천모던’ 보드게임 출품을 2개월 앞두고, 그동안 험난했던 그들의 여정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처음 만나자마자 스스로를 초보문화기획자라고 소개했지만, 능숙한 문화기획자 못지않게 콘텐츠에 대해 고민하는 그들의 진지함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화수분 제작소’에서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윤 : ‘화수분 제작소’는 <모던인천>이라는 첫 기획을 시작으로 구성된 팀이에요. 다만 앞으로 이곳에서 역사적인 것, 혹은 특별한 공간이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가공해서 문화콘텐츠로 꾸준히 만들고 싶어요.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로 어떤 콘텐츠를 제작하더라도 잘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요.
화수분 제작소 로고
이번에 <모던인천> 보드게임을 제작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김 : 개화기 근대를 먼저 접한 인천 상인들의 활동을 소재로 삼았어요. 새로운 문물이 끊임없이 유입되던 인천에서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근대의 현장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제작된 보드게임이에요.
세분이 어떻게 인천 중구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 : 저희 셋이 개항장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관동 갤러리에 들어갔어요. 마침 도다 이쿠코 관장님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인 류은규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인천은 캐도 캐도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말씀하셨죠. 그 때 나눈 대화가 워낙 인상 깊어서 개화기 인천을 소재로 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화수분’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는 계기도 되었고요.
윤: 저는 인천 중구에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마다 중구의 숨어있는 매력을 하나, 둘씩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특히, 근대건축물이 매력적이어서 인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었죠. 때마침 인천문화재단에서 청년문화 레지던시 공고가 나서 문화콘텐츠 기획에 첫 도전을 해 보았는데, 그때 이후로 인천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한 것 같아요.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인천 중구가 서울보다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지역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유홍준 작가 선생님께서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인지 인천을 더 많이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전생에 인천에서 장사하던 청나라 상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요.
전 : 울산에 살다가 서울에 온 터라 인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어요. 이번<모던 인천> 프로젝트를 통해 인천이 바다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으로써 근대화의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흥미로웠어요. 개항기 인천의 역동성과 여러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드게임의 형식과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맨 왼쪽부터 오른쪽 순서대로 <화수분> 팀원인 윤자형, 김현우, 전민지 씨. 리더 김현우 씨는 팀원 관리와 회계를 맡고 있으며 윤자형씨는 기획과 리서치를 담당하고 있다. 근대건축물에 대해 작업을 해오던 전민지 씨는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디자인을 책임진다.
<모던인천>을 제작하면서 인천 중구에 대해서 알게 된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김 : 네 맞아요. 작업하면서 근대 인천을 주제로 삼은 도서나 논문 등을 주로 찾아보는데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정말 화수분처럼 쏟아지더라고요. 아무래도 근대에 미지의 문물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밀려왔었고, 국내외 정세도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현장이었으니까요.
윤 : 중구는 원래 근대 역사의 현장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 건물과 장소들이 현존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는데 거기서는 근대보다도 조선 시대의 역사를 관찰할 곳이 많았거든요. 반면 인천 중구는 우체국, 구락부, 인천 제 1은행 등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첫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 많아서 흥미롭게 다가왔죠.
<모던인천>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나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있으신가요?
김 : 게임을 실제로 진행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어요. 플레이어 간에 균형을 맞춰가면서 큰 오류 없이 엔딩을 볼 수 있게 설계해야 했죠.
윤 : 가장 고민한 부분은 개항기의 역사적 사실을 게임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어요. 요코하마의 경우 일본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인천과 역사적으로 유사한 면이 많은 도시에요. 그런데 보드게임 ‘요코하마’(*히사시 하야시 작가가 제작한 보드게임)를 했을 때 역사의 특수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죠. 아마, 게임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추상화를 많이 입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 게임에서는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김구 선생님의 탈옥 같은 역사적 사건이 인천 상인들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상상하면서 우연적인 요소를 녹여내려고 노력했어요.
전 : <모던인천>을 설계하기 위해 시중에 출시된 여러 보드게임을 시도 해보았어요. 게임을 할 때 몰랐던 특징이 게임을 마치고 팀원들과 대화하면서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던 인천>의 뼈대를 잡았고, 게임을 하면서 재밌거나 지루한 부분을 생각하며 살을 붙여 나갔어요.
11월에 출품될 <모던인천>을 제작하는 화수분팀. 화수분 작업실에 방문했던 9월 초,
보드게임의 형식을 인천의 스토리에 접목하고자 메커니즘 설계를 하고 있다.
역사 자료를 수집하면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사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확인을 어떻게 하셨나요?
윤 : 전문가에게 자문을 요청해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려고 해요. 게임이라서 거짓된 정보를 그냥 넘길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게임 참여자에게는 자칫 심각한 흠으로 남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전 :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만 담게 되면 게임의 재미가 덜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게임에 필요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균형을 맞춰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화수분에서 지역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김 : 솔직함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나고 느껴야 콘텐츠로써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만든 사람도 재밌고요.
윤 : 논의가 많이 되지 않았지만, 외국작가 블라스트 씨어리(Blast Theory)의 작업을 보면서 동네 주민이 참여하는 보드게임을 잠깐 떠올린 적이 있어요. ‘참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주로 생각했었고, 기획 초기에 만들려고 했던 인천 소상공인 인터뷰집에서도 참여의 가치를 담으려고 했었죠. 결론적으로는 책이나 그림이 아닌 게임을 제작하긴 했지만,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을 하면서 개항기 역사의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여’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 역사성?
보드게임 <모던인천> 에서 선보이는 제물포 구락부(좌)와 인천해관(우) 그림 |
이번에 제작된 <모던 인천>에서 보완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요?
김 : 일단 아직 제작 중이라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요.
윤 : 테스트 버전이라서 보완하기에는 이른 것 같아요. 이번에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디자인해서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다음 프로젝트도 보드게임이라면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 유명 인사를 거론하거나 특산품을 내세우지 않는 이상 지역 콘텐츠는 그 지역 안에서만 향유되는 것 같아요. 지역 콘텐츠이기 전에 콘텐츠 자체의 생명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던 인천>을 보드게임으로서 손색없는 게임으로 만들려고 하죠. 여러 자리에 선보일 수 있으면 더욱 좋겠고요!
<모던인천>을 설계하는 화수분팀
‘청년예술인 레지던시 사업’ 공모에서 <모던인천>이 선정될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윤 : 저와 현우 씨는 문화기획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민지 씨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근데 셋 다 경력 칸에 마땅히 쓸 만한 게 없었어요. 프로젝트를 했던 경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연극공연이나 전시했던 경력마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공백으로 두고 서류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에도 오직 ‘기획의 참신성’만 믿고 지원해주신 인천문화재단에 많이 감사했었죠. 왜냐하면 <모던인천>을 계기로 저희 팀은 앞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할 단초를 얻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한편으로 어깨가 더 무겁기도 해요.
현우씨와 자형씨는 어떤 문화기획자가 되고 싶으세요?
윤 : 현재 박사 수료인데, 주변 사람들과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주로 교수나 어떤 연구원에 들어갈지 묻곤 했었어요. 하지만, 막상 내가 진짜로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몇 번씩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예전에 사람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하며 함께 작업했던 경험이 있었고, 이러한 프로젝트를 몇 번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면서 계속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지게 되었죠. 기획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되도록이면 현재 공부한 것을 논문도 좋지만 다른 형태로 작업하고 싶거든요. 보드게임이 그 중 하나이고요.
김 : 저는 자체적인 기획이 가능도록 역량을 갖춘 팀이 되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저희도 비록 지원을 받고 첫 프로젝트를 시도하긴 했지만 공공지원을 받는 경우에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았어요. 일시적인 행사에 그치는 경우도 많고, 지원금이 없는 경우에는 작업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요.
아쉽게도 아직은 여러 지역 콘텐츠가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화수분’에서는 기획한 <모던 인천>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으신가요?
김 : 저희는 <모던인천>이 공공기관에서 만들어지는 상품과 차별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실 공공기관에서 기획한 상품은 대부분 홍보나 교육용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것도 좋지만, 하나의 보드게임으로서 완성도도 갖추고 싶었어요. 그래서 보드게임의 재미를 우선순위에 두고, 다음으로 인천 개항장의 소재와 줄거리를 찾으면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화수분’에서 새로이 도전하고 싶은 지역이나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김 : 음, 심각하게 논의해본 프로젝트는 아직 없지만, 재미 삼아서 선거를 주제로 한 보드게임을 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어요.
윤 : <밤의 마녀들>이라는 스토리텔링 보드게임이 있어요. 소셜 펀딩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우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도 기회가 되면 한국의 여성 독립 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텔링 게임을 제작해보고 싶어요. 계속 게임 구상만 하는 것은 왜일까요?
전 : 우리 세 명 모두가 취미인 타로를 ‘산업혁명’과 ‘기계시대를’ 주제로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인터뷰 진행 / 정리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화수분 제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