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풀어낸 작은 이야기들

인천 1호선에는 ‘예술회관’이라는 역이 있다. 인천을 가로지르는 여러 전철역의 이름은 이렇게 직설적인 경우가 종종 있다. 예술회관역에 내려서 6번 출구로 나가면 인천문화예술회관이 나온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인천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은 꼭 방문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실내 공연장에서도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지지만, 야외 공간에서도 여러 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홈페이지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내가 관람한 공연의 제목은 <Inside Out :산-64번지>다.  인천시립무용단이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N포세대를 위로하는 댄스-쓰루 뮤지컬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다. 댄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말하자면 뮤지컬의 세 가지 요소인 춤, 연기, 노래 중 노래를 제외하고 춤과 연기로만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공연이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을 흔히 송-쓰루 뮤지컬이라고 하는데, 대사 없이 춤만 선보이는 이 공연은 댄스-쓰루 뮤지컬이다. 필자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장르였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반, 어색한 마음이 반이었다. 공연을 보러 온 꽤 많은 인파로 입구가 북적이고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관객의 연령 폭이 넓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사실, 대사와 공연을 접하기 전까지는 노래가 없다는 점이 공연에 상당한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래가 감정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연극보다 뮤지컬을 조금 더 선호하는 나로서는 과연 노래가 빠졌을 때 어떤 느낌의 무대가 될지 궁금했다.

인천 시립무용단 제공

산-64번지의 사람들
무대의 배경은 어느 허름한 산-64번지 동네. 아기를 업은 여인 한 명이 한껏 멋부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허영심 가득한 부동산 업자에게 길을 물어본다. 부동산 업자는 반가운 얼굴로 여인을 맞이하지만, 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에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며 굉장히 불친절한 태도로 산-64번지에 들어가는 길을 가리킨다. 이 산-64번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노처녀, 백수, 할머니, 그리고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이는 청년들. 세간에서 흔히 ‘루저’라고 여겨지는 그들은 각자의 고민을 안고서 낡아빠진 작은 동네에 모여 산다. 한 건 올릴 생각만 하는 부동산 업자는 부유층 사모님의 재개발 계약에 침을 흘리며 동네 사람들을 유혹하고, 결국 산-64번지는 사라질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며 막을 내린다. 진중하기도, 웃기기도, 슬프기도 한 장면들로 이뤄진 무대는 무언가 큰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다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재개발로 살던 곳이 철거되어 떠나야 하는 아픔을 모든 사람들이 겪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큰 실의에 빠지거나 슬픔을 겪는 감정은 모두가 같다. 다만 상황이 다를 뿐. 사람들이 산-64번지를 볼 때에는 각자가 겪었던 상황들이 뇌리 속에 떠오를 것이다. 절망스럽더라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의지하면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고, 더 큰 절망스러운 일이 닥치더라도 삶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는 대신, 앞을 향해서 걷는 것을 선택한다.

인천 시립무용단 제공

음악과 춤, 춤과 음악
<산-64번지>에서는 창작된 음악뿐만 아니라 흔히 많이 들어보았을 법한 ‘담뱃가게 아가씨’ 같은 대중음악을 사용했다. 관객들은 자신이 아는 익숙한 음악에 맞춰 배우들이 춤을 출 때 감정이 더욱 많이 이입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사도 노래도 없는 무용극은 불친절한 장르일 수 있다.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산-64번지는 친숙한 음악으로 커버했다고 생각한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한번 깨지는 순간 무대에 몰입하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배우들의 표정 연기와 섬세한 손짓과 발짓이 극대화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발레, 현대무용, 비보잉 등을 적절하게 섞은 창작 무용에서는 대사를 넘어선 어떤 힘이 있었다. 그들이  말을 전혀 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그들의 몸짓에 웃거나, 탄식하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춤에 이런 힘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은 이 표현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습했을까. 그들의 노력에 감동을 느꼈다. 특히, 몇 번을 거절당해도 하염없이 부동산 업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필하는 노처녀가 마지막으로 크게 바람을 맞고 괴로워하는 독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큰 무대를 휘어잡으면서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는 그녀의 몸짓은 놀랍도록 애절하고 슬펐다. 어떻게 보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날카로운 춤이었다.

인천 시립무용단 제공

N포세대, 앞으로 갈 수 있을까?
앞서 말했지만 산-64번지의 사람들은 살짝 어딘가 ‘루저’와 같은 기운을 풍긴다. N포세대.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몇 가지는 포기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대. 왜 우리는 살기 위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까. 아마도,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지겹도록 익숙할 것이다. 산-64번지. 4와 6은 5보다 조금 적거나 많은 숫자다. 64번지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 어떤 평범함보다 조금 낫거나 조금 덜한 사람들. 하지만 역시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계속된다. 무자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이것대로 어마어마한, 어떤 버릴 수 없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는 살 것이고,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흘러간다. 때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뒤를 돌아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걷게 된다.

인천 시립무용단 제공

“life goes on”

내가 산-64번지를 보며 느낀 메시지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 이 산-64번지는 춤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댄스-쓰루 뮤지컬 형식이다. 관객들도 느꼈으리라. 대사 대신 춤으로 뿜어낸 그들의 열기를. 이런 열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밝고 어두운 일들도 춤추듯 매끄럽게 우리의 삶을 쓰다듬고 가지 않을까.

인천 시립무용단 제공

 

글/ 이은솔 시민기자단
사진/ 인천 시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