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과의 단절 – 인천가족공원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봄 소풍으로 만월산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약사사를 거쳐 야트막한 만월산 능선에 다다랐을 때, 처음으로 건너편의 산을 보았습니다. 만월산 너머엔 비슷한 높이의 금마산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마산의 사면 전체는 나무 대신 묘지로 빼곡히 메워져 있었습니다. 처음 본 낯선 광경에 그것들이 묘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선생님께 무엇인지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막연하게 알았던 죽음 이후에 묘라는 안식처가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 제가 보았던 거대한 공동묘지는 ‘인천가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시민들의 마지막 삶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인천가족공원은 대단히 큰 규모의 공원묘지입니다. 어르신들에게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익숙한 인천가족공원은 현재는 수도권 대표 공원묘역으로, 그 규모만 해도 83만 2,800㎡에 달하며 망우산의 서쪽 사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원에 설치한 승화원, 여러 봉안당, 홍보관, 외국인 묘지를 제외한 순수 내국인 묘지 개수만 해도 166만 개에 이르며 그 크기는 8,729㎡입니다. 약 37만㎡ 크기인 송도국제도시의 센트럴 공원과 비교했을 때 센트럴 공원의 약 4.5배가 묘지로 조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천에 살면서 생각보다 이 공간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불과 500m 남짓 떨어져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지하철에서 도착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만 이 근처 어딘가에 위치한 인천가족공원이 떠오르게 됩니다. 우묵한 호리병 모양 지형이라서, 다른 곳을 가려다 지나치는 일도 없습니다. 선친이나 가족 중 한 분이 이곳에 모셔져 있지 않다면, 굳이 이곳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을 법합니다.

공동묘지는 일상생활과는 참 먼 곳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문화권에서 묘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그리 동떨어진 공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과 성저십리 내에 묘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지만, 한양도성 밖에서 묘는 암묵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선산이나, 선영을 만들 수 없던 평민들은 마을 인근에 있는 산 하나를 공공묘역으로 만들었고 그 묘역을 ‘북망산’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에서 조상의 묘와 마을 사람들의 묘는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유지 보존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가깝지만 먼 나라인 일본은 화장이 일찍이 일반화되어 마을 신사나 절에 유골함을 안치했고, 프랑스에서 묘지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장소였습니다. 파리에는 도시 한 가운데 이농상 묘지라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곳은 수도자의 설교 공간이면서 온 가족이 소풍을 가고 장터가 열리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을의 납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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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이농상 묘지의 15C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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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접어들었을 때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서구의 묘지는 가장자리로 이전되면서 공원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파리의 유명한 몽마르트르 묘지, 몽파르나스 묘지 등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유럽의 근대적 묘지는 도시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언제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서구의 공원묘지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지만, 우리의 묘지는 유럽과는 다르게 급격히 시민들의 삶과 분리되었습니다. 경성부는 당시 한양도성 외곽에 산재했던 묘를 한곳에 모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망우리 공원과 같은 공동묘지를 여럿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묘지를 구분하는 차별 정책의 일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묘지에 행려병자 등의 시신을 대강 매장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여, 공동묘지 인근에서는 들개가 인골을 물고 다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동묘지는 사람들에게 점차 기피시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과학적’으로 여겨졌던 화장장은 당시 부족한 기술로 인해서 오히려 악취의 원인이 되었고, 사자의 안식을 위했던 과거의 장례의 이미지를 시신을 ‘빠르게 처리하는 공장’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묘지와 화장장은 오염원이자 혐오시설의 이미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런 인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시 외곽에 형성된 공동묘지와 화장장은 도시가 확장되고 개발될 때마다 더욱더 멀리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전쟁 이후에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이 지어졌던 홍제동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화장장 이전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서울시의 시립 승화원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시립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습니다. 인천도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인천 주안에 설립되었던 화장장은 70년대에 현재의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했고, 도화동에 있던 중국인 묘지는 선인재단의 학교 건설로 인해 만수동으로 옮겨지다가 주택개발에 밀려 인천가족공원으로 다시 이장해야만 했습니다.

 
과거 공원화되지 않은 인천가족공원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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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가 정비되고 납골당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현재의 인천가족공원 출처(자세히 보기 ▶)

1990년대 이후에 산지에 묘지가 설치되면서 산림 훼손에 대한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자 화장과 봉안당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장례문화로 정착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와 달리 공원의 형태로 조성된 묘지는 이제 오염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죽은 자의 공간은 도시와 어울리지 못하고 격리되어 있습니다. 장묘시설은 학교와 어린이집 같은 교육시설로부터 200m 내에 건립될 수 없게 법적으로 규정되었고, 봉안당 설치와 관련해서도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도시 사람들의 삶과 망자의 공간은 공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청라 시티타워역 희망탑>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 현대인들의 삶은 더 복잡해졌고 인구는 점점 증가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내 집, 나의 동네에 머무르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일같이 일터와 학교로 이동해야 하고,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이사를 거듭 반복해야 합니다. (실제로 2016년 인천시 거주 가구 중 약 42% 정도가 무주택 가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도시 위에서 부유(浮游)하는 시대, 혹은 세대를 이어 이웃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1900년대 직후에 내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돌보던 전통적 마을 공간 속에서 나타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더는 유효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 오랫동안, 망자의 공간은 우리 동네에 없어야 하는 혐오시설이고, 먼 곳의 어딘가에 있는 무관심한 공간입니다.

장례문화가 일종의 산업이 된 오늘, 지난 백 년에 걸쳐 도시 안에서 밀려난 망자의 공간은 더는 도시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적절하게 도시 공간을 분배하고 활용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도달할 망자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먼 곳으로 밀려난 모습이, 마치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과 같다는 생각에 슬프고 허무한 마음이 듭니다.

 

글/사진제공 김윤환(도시지역전문가)

[참고문헌]
기세호(2017), 근대화로 인한 묘지와 도시 사이의 거리 변화에 관한 연구-파리와 서울의 비교를 통해-,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송승석(2015), 인천 중화의지(中華義地)의 역사와 그 변천, 인천학연구 22
정일영(2016), 일제 식민지기 사자공간의 배치와 이미지형성-공동묘지와 화장장을 중심으로-, 사림 57
인천시설공단 (자세히 보기 ▶)
“弘濟洞 火葬터를 옮겨라”. 경향신문 1958년 8월 9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墓地滿員 묻힐 땅이 없다”. 경향신문 1981년 4월 10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장묘문화 화장중심 개혁’ 시민운동 전개”.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