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도시 인천의 역사와 가능성
한때 서울 용산보다 클럽이 많았던 부평
음악 팬들이 인천의 서양음악 역사를 이야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시대와 장소는 1960~1990년대에 음악인들이 집결했던 신포동 및 동인천 일대나 부평, 관교동 등지를 많이 이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범위를 글쓴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인천의 음악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조선후기 개항시대부터 ‘두터운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니까. 서양 군악대의 행진곡이나 찬송가 등이 가장 먼저 유입되고 연주됐으며 한국 최초로 서양음악 교육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인천이라는 점은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글쓴이가 이 장에서 미군 주둔 이후 1960년대를 글의 ‘시대적 기점’으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글쓴이에게 허락된 원고분량 및 주제상 조선시대부터 훑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 두 번째는 서양음악의 범위를 소위 ‘팝 뮤직’의 부분으로만 한정한다면 해방 이후 미군정 혹은 한국전쟁 이후 시기서부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통상적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이후 한국 내의 서양 대중음악에 대해서는 대체로, 주둔했던 미군부대의 주변에서 수많은 기록들이 나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군부대 주변이 팝 음악이 유입되고 소비되는 가장 큰 시장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즈와 로큰롤 등 당시 미국민들 눈높이에서 유행하는 서양 대중음악의 소비는 군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고, 자연히 한국도 이 영향을 받았다. 실례로 훗날 가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배호와 오기택 등의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보이스가 미국의 크루너 재즈 보컬리스트(이를테면 프랭크 시나트라, 냇 킹 콜과 같은)들을 자양분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던 인천은 당시 이러한 서양 대중음악의 한국화에 좋은 토양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미 군수지원 사령부 ‘애스컴(Ascom)’이 있던 부평은 그 중심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인근의 음악 클럽 수가 한때는 용산보다도 많았다는 기록도 여러 문헌과 전언 등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이곳을 거친 가수나 뮤지션들도 훗날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케이스가 상당했다. 앞서 언급한 배호를 비롯해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과 키보이스의 김홍탁, ‘몰라요 몰라’를 부른 그룹 데블스의 김명길과 연석원, 그리고 지난 2004년 작고한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과 현 사랑과 평화의 리더 이철호 등은 이 당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거나 연주한 경험들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인천 뮤지션들 가운데 하나다.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 동인천과 남구 원도심
부평의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해도,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 역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이는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시청을 중심으로 발전한 상권 및 문화권과 궤를 같이 했기 때문인데, 실제 이 주변으로 많은 클럽들(당시엔 ‘고고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옛 인천시민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바다. 대표적으로 초창기 ‘사랑과 평화’가 장기간 공연하기도 했던 뉴 반도와 맞은편에 위치했던 뉴 월드 관광나이트, 그리고 옛 인형극장 자리에 있던 신광 나이트클럽, 그리고 동인천역 인근 인영 고고장과 옛 인천 사람들이면 다 아는 극장식 나이트클럽 ‘국일관’ 등의 기록은 과거 신포동 음악 신이 보여준 ‘중흥과 쇠퇴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주요 멤버들이 연주하던 곳으로 유명 가수들도 많이 무대에 올랐던 ‘국일관’은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명소로 평가받았다. 국일관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난 2010년까지 영업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으나, 영업 종료 이후 2014년 건물을 철거해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고 현재는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가 새 건물을 세운 상태다.
그런데 부평이나 신포동보다는 다소 훗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곳들 말고 뮤지션들이 모여들던 또 하나의 중요한 거점이 있었으니, 현재 ‘인천의 압구정동’으로 불리는 관교동이 바로 그곳이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허허벌판에 차도 다니지 않던 곳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순복음교회와 남인천여중, 인명여고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갔고, 동아, 풍림, 쌍용 등 대형 아파트들의 건축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그 근처에는 원룸이나 빌라, 상업건물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즈음 이 동네에는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뮤지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글쓴이가 기억하기로 당시 이곳에서 연습실로 쓸 만한 공간들의 월세가 엄청나게 싼 편이었는데, 대부분 보증금이 100만 원 이하에 월세 또한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훗날 음악 칼럼니스트 성우진을 비롯한 음악계 선배들과 뮤지션들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당시 관교동에 연습실을 잡고 있던 밴드는 블랙 신드롬과 크래시 등 한국 헤비메탈 역사에서 북극성과도 같은 팀들은 물론 제로 지와 터보, 그리고 체리필터 등도 있었다. 그러니까, 관교동에 모였던 뮤지션들의 대부분은 록/헤비메탈 계열이었던 것.
참고로 관교동으로 뮤지션들이 모여들기 전 시점이라 할 수 있는 1985년에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헤비메탈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현 부활의 드러머 채제민과 과거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의 수장이었던 양범석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던 ‘제3세계의 꿈’이라는 밴드와 이승철, 김경호 등 가수들과도 함께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박창곤, 김창완 밴드 출신으로 현재 인천 밴드 ‘미인’의 드러머 이민우 등이 멤버로 활약했던 ‘아웃사이더스’가 지금은 없어진 옛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인천의 대표 록 밴드 ‘사하라’의 공연을 비롯해 시민회관이 역할을 다하고 사라질 때까지 많은 횟수의 록 공연들이 그곳에서 열렸고, 그중엔 한국의 음악 전문지 ‘핫뮤직’이 기획해 전국의 유명 록 뮤지션들이 모두 모이는 기획공연도 수차례 있었다. 이렇게 옛 시민회관에서의 공연 그리고 현 인천예총이 사용 중인 수봉공원 문예회관(인천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들이었던 RPM, 비비드, LPG, 사두, 440E(B4U) 등이 자주 공연을 가졌음) 등에서의 무대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된 밴드들끼리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가 결성되기도 했는데, 이 연합회는 1997년경까지 활동하다 지역의 모든 문화신을 집어삼켰던 IMF의 광풍을 이기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됐다.
인천 음악 신의 부활, 관건은 ‘지역사회의 관심’이다
비록 여러 요인들(IMF, 도시 변화로 인한 상권 이동, 그리고 당시 밴드들의 좁았던 자작곡 퍼센트 등등)이 겹치며 인천의 음악 신도 완전히 사라졌지만, 다행인 것은 15여년 뒤인 2000년대 후반 및 2010년대 초반서부터 서서히 부활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것이다.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통해 지역의 공연문화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문화기획자들은, 홍대의 인디 문화를 인천서도 꽃피울 수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금 토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실례로 2007년경부터 연주자들의 무대를 기획한 재즈 클럽 ‘버텀라인’과 2009년 영업을 시작한 ‘글래스톤베리’ 등 신포동의 음악 클럽들이 홍대 인디 신에서 기획공연으로 자리를 잡은 라이브 클럽들을 벤치마킹해 1주 정도에 1~2회씩 지금도 자체 무대를 열고 있고, 이 영향은 본디 LP카페로 출발했던 ‘흐르는 물’ 등 인근 업소들이 간헐적으로 기획공연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부평의 ‘락캠프’, 주안동의 ‘쥐똥나무’, 인하대 인근의 ‘울림’ 등이 홍대 클럽을 일부 모델화해 공연을 열고 있고, 사라진 ‘인천그룹사운드연합회’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천밴드협회’가 몇 년 전 조직돼 활동을 재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인천 부평에서 활동했던 ‘루비 레코드’는 2013년부터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형 축제 ‘사운드바운드’를 통해 과거 신포동과 부평 등 대중음악 역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는 곳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뮤지션 중에서는 일본 뮤지션들과도 교류 중인 ‘해머링’과 ‘투견’, ‘블랙 메디신’ 등을 비롯해 최근 인디 신에서 주목받는 알포나인틴, 빌리지 브라더스, 포 헤르츠 등이 인천과 서울 등을 오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글래스톤베리’의 이진우 대표는 “인천 전역에서 음악에 대한 다양한 일과 다양한 무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다채로운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한 바가 있다. 실제 이 대표의 이러한 언급은 지역 내 클럽의 오너들과 문화기획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 인천 음악 신의 부활은 이들이 내리는 노력의 뿌리에 인천시민들이 보여주는 관심을 거름으로 할 때에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아직은 이들의 노력에 비해 지역사회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매우 저조한 편인데, 공직자들과 언론은 물론 시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하다. 시나 구에서도 할 일이 많다. 가장 먼저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밴드는 물론 인천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활동까지 빼놓지 않고 기록해나가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인천의 위치는 그 기록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 / 배영수(인천in 기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