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후에는 젊은 연극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극단<십년후>인터뷰 송용일 대표

죽마고우였던 두 친구의 약속으로 맺어진 극단 <십년후>가 5월 24일에 인천중구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극단의 꿈을 실현하는 송용일 대표와 단원들. 그들의 의지와 묵직함이공연을 마치고 공연장 밖으로 향하는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 오늘도 극단 <십년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한 울림으로 관객들과 마주할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극단 <십년후> 창단 배경이 궁금합니다.
친구 사이였던 최원영 박사님과 장진호 교수님 두 분이 10년 만에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한번 꿈꿔보자는 의미에서 <십년후> 극단을 만들었어요. 1994년도에 창단했는데, 당시 최원영 박사님은 미국 유학 생활을 끝마치고 귀국했을 시점이었고, 장진호 교수님도 일본에서 연극 유학을 마쳤을 때였거든요. 창단한 이듬해에 저는 <십년후> 극단의 공연 무대를 제작하면서 두 분과 인연이 닿았고요. 그러다 장진호 교수님이 대경 대학교에 정식 교수로 임용되면서 제가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최원영 박사님께서 5년 전 리더십 교육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저에게 극단 대표 직책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셨죠. 

과거에 연출만 담당하셨을 때와 현재 대표 직책을 맡으면서 연출 할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극단의 색깔과 틀이 바뀐 것은 없어요. 다만 점차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저도 타협하는 부분이 생긴 것 같아요. 과거에는 <십년후>가 대극장에서만 공연했었어요. 그때의 마인드는 5천만 원을 투자하면 1억 벌자는 생각이었죠. 무대미술에 과감한 시도를 많이 했었거든요. 지금은 작품뿐만 아니라 극단 전체를 관리해야 하니까 경제적인 부분이 제일 걱정이더라고요. 대극장에서 공연하면 관객을 어떻게 채워야할지 고민이 되고, 제작비 문제를 생각해야 하니까 점점 움츠러들더라고요.

극단의 모토가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입니다. 25년 동안 극단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도 ‘사랑’인가요?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에 내포된 의미는 사람 중심의 극단이 되자는 거예요. 배우들이 이곳에서 배우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기 계신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극단을 24년 동안 버텨온 힘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 생각해요.현재 극단체제가 대부분 오디션 제도로 바뀌었지만, 여기서는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배우들과 함께 밥을 먹고 연기를 하면서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 극단에 구체적인 규칙이 있나요?
연출가 입장을 연기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려고 해요.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고요. 제가 연출을 맡았지만 가능하면 우리 배우들이 큰 무대로 올라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하죠.
한때 종합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펼쳤던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 작품이 매진사례를 겪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액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유명 배우를 주인공으로 써달라는 투자자의 제안이 있었거든요. 연출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는데 최원영 (전)대표님께서 거절했죠. 유명배우가 주인공을 맡는다면 편하게 공연할 수 있지만, 우리 단원들이 들러리가 된다는 (전)대표님의 의견이었어요. 눈앞에 있는 이익을 좇기보다는 우리 사람을 키워서 그만큼 유명한 배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대표님의 의지이기도 하고요. 초창기에 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 것 같아요.

다른 극단과 가장 큰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기 오신 분들이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해서 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극단에 있을 때만이라도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해요. 편해야지만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한다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하고요. 최원영 (전)대표님이 계셨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인문학 강연을 했어요. 그런 방법들이 <십년후>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던 토대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십년후>에 새로운 누가 와도 <십년후>의 정체성이 그 사람에게 동화되지 우리가 그 사람한테 동화되지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요.

창작극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해외에서 유명한 명작을 그대로 가져와서 공연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국내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들고 싶은 포부가 있었어요. 당시에 모든 공연에 외국작품은 흥행하고 국내작품은 흥행이 안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거든요. 국내 공연을 아동극이라고 스스로 치부해버렸으니까요. <흥부 놀부>전을 연극으로 제대로 만들면 세계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매번 있었죠. 그 계기로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라는 창작극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으로만 10년 동안 순회공연을 여러 번 거쳤던 것 같아요.

창작극을 선정하거나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성 코드가 있는가요?
일단은 관객이 연극을 볼 때 재밌어야 해요. 재미라는 것은 웃음의 재미도 있지만 감동의 재미도 있어야 하지요.연극을 보고나서 실망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예요. 그 다음에 연극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을 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험극이나 관객을 소외시키는 연기는 연극이 아니라 미술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그 영역은 철저히 작가 중심이지요. 연극은 종합예술이에요. 즉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호흡하는 공연을 펼쳐야 한다는 거죠.

대부분 작품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소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극단 <십년 후>가 전달하고 싶은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가요?
항상 작품에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를 극을 통해 투영하고 살펴보는 거죠.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내용이었다면 <신포동 장미마을>은 자본에 매몰된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을 보여주죠. <소문>은 고인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만든 작품이었어요. 인터넷 댓글의 심각성을 작품에 담은 거죠. <소문>에 귀머거리 ‘선이’라는 인물이 등장해요. 젊고 이쁘장한 ‘선이’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결국 소문의 희생양은 ‘선이’가 되죠. 소문과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상황을 코믹하게 표현했어요.

<성냥공장 아가씨>,<신포동 장미마을> 등 인천을 배경으로 한 창작극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역민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반응은 상당히 괜찮은 편이에요. 다만, 지속해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관객층이 두터워졌으면 좋겠고 문화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인천 시민들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극단 ‘십년 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요?
실제로 <신포동 장미마을>의 모티브는 작년에 했던 시민창작 뮤지컬 <보물지도>였어요. 작년에 ‘인천왈츠’를 위해 시민 20명과 같이 <보물지도> 대본 작업을 했는데 ‘보물지도’라는 소재가 꽤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그 소재를 살려서 <신포동 장미마을>을 연출했죠. 신포동 원도심에 재개발이 안 돼 있다 보니, 여기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가상의 극을 다루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주옥같은 작품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처음 창작했던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 애착이 많이 갑니다. 앞으로 계속 키우고 싶은 작품은 <성냥 공장아가씨>, <소문>이고요. <성냥공장 아가씨>는 인천의 폐공장에서 공연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2006년 전국 연극제 대통령상, 우현 예술상 등에 이어 최근에 인천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10년 후에는 어떤 극단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앞으로의 십년 후에는 제가 아니고 또 다른 구성원이 이끌 것으로 생각해요. 그때 “<십년후>라는 극단이 열심히 했구나, 인천에서 활발히 활동했구나”라고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연극제에 저희 말고도 젊은 연극인들이 많이 나와서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글/사진
이진솔, 최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