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시간에 가득한 사건들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중국십방아트센터>교류사업에 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어느덧 중경에 온 지 한 달 반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참 잘 간다. 타지에 있으면 매일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사소한 발견에 의미를 두어 곱씹어서 생각한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장소와 경험이 떠올라 시간이 금세 지나간 것 같다. 사실 이곳에서 체감하는 하루의 속도는 한국에서 보낸 하루보다 훨씬 더 느린데도 말이다. 현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예전부터 ‘젊어서는 쓰촨성에 살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느리고 게으르기 때문에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중경도 예전에는 쓰촨성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춥고 더운 동부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은 빠르고 급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날씨에 사는 서부 사람들은 말도 느리고 태평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게을러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느긋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중경 사람들은 바짝 열심히 일하고 잘 쉬는 것 같다. 나도 중경의 후덥지근한 날씨와 잦은 폭우 속에서 느리지만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단기 레지던시의 아쉬운 점은 미술 재료와 도구들을 어느 정도 갖추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모호하다는 점이다. 특히 외국에서는 더 그렇고 나처럼 여러 매체를 다루게 된다면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장비를 비롯한 작업 환경조성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기엔 시간이 아깝다. 그렇다고 불편함을 감수해서 작업하기엔 효율성이 너무 떨어진다. 꼭 필요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촬영 카메라 받침대, 페인팅 테이블, 선반 2개, 그림 걸이 패널은 유효기간이 3개월이기 때문에 오직 시간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제작했다. 스튜디오 주변에서 쓰다가 남은 목재들을 주워다가 만들었고 약간의 부실함과 마감처리는 너그럽게 눈감아 주었다.

위의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서 드릴, 망치, 못, 피스는 직접 구매했지만, 그 밖의 장비들은 DAC의 목공실에서 빌려 사용했다. 나무를 자르는 작업 역시 톱밥이 많이 날리기 때문에 목공실에서 해결했다. 이번에 목공실을 사용하면서 알게 된 점은 작가레지던시 이외의 시설들이 특이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목공실, 음악작업실, 사진 스튜디오, 서예교실, 원단염색실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 있는데 그곳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이자 책임자가 상주한다. 이러한 시설은 공용공간이 아닌 책임자의 개인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은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협업과 작업을 의뢰할 수도 있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이 방식은 꽤 영리한 세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문 시설들은 아무나 함부로 사용하면 위험할뿐더러 장비가 고장 나기도 쉽다. 다양한 시설을 보유해도 관리가 안 되면 득보다 실이 많고, 일정 시간 방치되면 수습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보여주기식 행정에서 자주 생기는 일이다. DAC는 전문 예술가이자 시설 책임자의 개인사업 활동을 후원하면서 그들의 시설이 지속해서 활성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책임자들은 장기간 무료로 작업실을 사용하며 기관을 통한 다양한 교류에 참여할 수 있다. 아울러 레지던시 작가들도 꼭 필요하다면 매일 출퇴근하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내가 허락을 받고 목공실 기구를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모두 DAC와 마찬가지로 지역 예술과 관계가 있고 문화 연구와 개발이라는 공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Wenchuan Liang의 개인전

동료 레지던시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이 있었다. 도자를 굽는 작가인데 몇 점의 회화 작품을 포함하여 벽에 거는 조소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판매촉진을 위해 DAC 레지던시 전시공간이 아닌 디자인 가구 전문점에서 도자기 전시를 진행했다. ADC (Art and Design Center)에 위치한 꽤 큰 규모의 가구 매장이었다. 솔직히, 전시 관람을 위해 매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아쉬움이 컸다. 아무래도 크고 멋진 가구들이 많다 보니 작품이 그저 소품처럼 보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웬첸의 작업이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 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9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니 참 부지런하다. 작품을 하나하나 보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진열된 또 다른 작품에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편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아쉬움은 차츰 사라지고 오히려 큰 가구들이 도자 작업을 위한 조연 역할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메인홀 벽까지 걸려있는 조소 작업은 작가의 예술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쇼케이스 역할을 했다. 그 앞에 멈춘 사람들은 작품에 감탄하며 그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흙으로 구운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곱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전부 어린아이의 옷 모양을 하고 있었다. 레이스 한 올까지 정교하게 재연한 작품은 마치 깨끗이 빨아 놓은 보들보들한 아기 옷처럼 보이지만, 사실 물질적으로 돌에 더 가깝다. 작가가 현재 겪고 있는 가족사와 자신의 어린 딸과의 관계를 반영한 작품인 것 같다. 아름답고 애잔하면서 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Tagman 퍼포먼스 작업

중경 거리의 사람들을 그리는 것은 내가 DAC 레지던시에서 펼치는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때문에 나는 외출 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점점 사라지는 거리의 노동자 방방, 밖에 나와서 카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가게 안에서 마작을 하는 사람들, 뛰어노는 아이들, 거리의 고양이와 개들, 오토바이와 자동차, 해가 질 무렵 광장에 나와서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까지 이 도시를 느끼게 해주는 모든 것을 작은 그림으로 그린다. 어차피 외부인의 시점에서는 도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려고 노력했고, 그 그림을 다시 거리에 나온 시민들과 나누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300개의 그림을 인쇄해서 약 2000개의 태그를 만들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정보화되는 현시대를 표현함과 동시에 예술의 소비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업이다. 한국에서 1년 가까이 계획했던 작업인데 어쩌다 보니 중경에서 첫 시작을 했다. 중국은 한국과 다른 형식의 SNS와 정보 공유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 부분 수정이 필요했지만, 퍼포먼스 작업을 다른 환경에 맞추어 현지화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레지던시 매니저 Jing 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주말에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 나가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를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도 잠시, DAC의 홍보를 담당하는 Shao Lihua와 Hu Ke가 미팅을 제안했다. 그들은 나의 퍼포먼스 작업에 위험 요소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퍼포먼스 장소로 염두에 두던 쥐팡베(Jiefangbei) 거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끄는 행위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는 쥐팡베 거리뿐만 아니라, 어느 명소에서나 해당된다. 쥐팡베는 거대한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중경 도심 중심부에 있는 쇼핑거리이자 유명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광장이다. 재작년에 그곳에서 어느 여 작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사람들이 공연을 볼려고 모여드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공안들이 그녀를 잡아갔다고 한다. 섬뜩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사복 공안이 있는데 그들은 정치적 선전이나 선동을 감시하고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예술 활동을 금지하거나 처벌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거나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즉각 수습에 나설 것이라는 것이다. 아뿔싸, 나는 공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다. 내 작업은 정치적 성격도 없지만, 그들에게 내 작업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게 뻔하다. 너무나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긴장감이 넘치지만, 허탈한 웃음과 함께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진다. DAC와 나의 안전을 위해 퍼포먼스 위치와 시간을 조정했고 조만간 진행할 작업이 더욱 기대된다.

 

글/ 사진
박경종 작가

 

박경종 작가는 페인팅, 애니메이션,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현실을 빗댄 상상의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예술활동지원 역량강화 분야에 선정되어 중국 중경에 위치한 십방아트센터에서 3개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 (인스타그램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