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4월, 강화도 그리고 광해(光海)

강화도의 4월은 참 아름답다. 4월은 강화에서 고려산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철이다. 또한 진달래 말고도 온갖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강화의 곳곳을 장식한다. 하지만 약 400년 전 누군가에게 강화의 봄, 강화의 4월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슬픔과 회한의 계절이었다.

1623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의 어느 날, 왕이 쫓겨났다. 새로 등극한 왕은 쫓겨난 과거의 왕을 섬으로 유배 시켰다. 새로운 왕은 인조였고 쫓겨난 왕은 광해군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한다. 광해가 유배된 섬은 강화도였다. 도읍 한양에서 너무 멀리 보내버리는 것은 불안했던 것일까. 인조는 일단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화도를 유배지로 택하였다. 광해가 강화로 가던 때가 양력으로 4월이었으니 따뜻한 봄날이었다. 아마 당시 강화에도 온갖 봄꽃이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에게는 그 봄꽃들도 슬프고 처량하게 느껴졌으리라.

광해가 쫓겨나면서 왕비, 세자, 세자빈도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집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혀 생활해야 했던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광해와 왕비는 강화 동문 쪽에, 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광해는 강화도의 유배생활 중 큰 비극을 겪는다. 유배 온 지 석 달 뒤인 6월 폐세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고 도주하려다 붙잡혔다. 이 일이 일어난 직후 폐세자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폐세자도 곧 사사(賜死)가 결정되어 목을 매고 죽음을 맞았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 그해 10월 부인 폐비 유씨도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마 화병이었을 것이다. 폐위되고 반년 조금 넘는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모두 잃는 비극이 강화도에서 일어났다. 광해에게 강화는 아픔의 섬, 비극의 섬이었다. 이후 광해는 교동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고 1641년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해는 명을 배신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란복구에 힘썼으며, 명에 대한 맹목적 사대를 배격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실리외교를 통해 나라를 지키려 하였던 군주로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에 광해는 폭군은 아닐지언정 혼군(昏君)으로서 무리한 토목공사 등을 강행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임금이라는 평가 또한 여전히 만만치 않다. 과연 그는 어떤 임금이었을까? 강화의 봄을 맞으니 그가 다시 생각난다.

 

글·사진 /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