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람 되기, 인천사람 만들기 – 인천SK행복드림구장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월이 되자 다시 포털의 스포츠 페이지에 프로야구의 각 팀의 올해 전망이나 선수의 각오가 담긴 인터뷰, 스프링캠프에서의 연습경기 결과와 같은 기사들로 메워지고 있습니다. 2018년의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조금 가볍게, 야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프로야구는 급격하게 팬이 늘어났습니다. 2006년 300만 명을 간신히 넘긴 관중 수는 2011년에는 680만 명에 도달했고, 최근 2년간은 800만 명이 넘는 관중이 매년 야구장을 찾으면서, 국민 스포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6년 야구장을 찾은 관객이 331,143명이었던 것에 반해, 2007년엔 곧바로 두 배에 가까운 656,426명이 이른바 ‘직관’을 했습니다. 2012년에는 인천의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해 관중이 100만 명을 넘기도(1,069,929명) 했습니다. 인천은 꾸준히 80만 명을 상회하는 관중을 동원하는, 나름 ‘빅마켓’이 된 것입니다.
프로야구는 탄생한 이후 꾸준히 사랑을 받았지만 2010년대의 인기가 유례가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천 야구도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의 자부심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 구단의 역사가 다사다난하기도 하였고 전통적으로 스몰마켓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것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10년간 급상승한 프로야구의 인기를 보며, 과거와 달라진 도시와 야구, 더 나아가 도시와 프로스포츠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1982년 프로야구의 탄생,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의 시작이 당시 독재정권에 의한 3S 정책의 일환이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다시금 부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한 것은 국가가 직접 지역과 운영 기업을 선정하고, 구단의 운영까지 개입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여가의 시간과 공간을 국가가 원하는 한 지점에 몰아넣음으로써, ‘야구를 보는 즐거움’을 ‘정권에 대한 만족감’으로 치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로 누적되어 온 지역감정이 각 지역에 하나씩 배분된 야구에 투영된 것은 어쩌면 당시 독재정권의 목적이 성공적으로 달성되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간혹 벌어지는 선거에 드러내기보다, 매일 벌어지는 역동적인 야구에 투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짐작하다시피, 인천야구의 역사는 이러한 틀로 읽어내기 조금은 애매하지요. 인천 야구는 오랜 역사와 우수한 고교팀의 인기를 갖고도 프로 구단을 운영할 기업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 여러 기업으로 팔려야 했으며, 한때는 구단이 도시를 두고 떠나고 그 빈자리는 어제까지 다른 도시의 구단에서 뛰던 선수들이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인천을 대표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천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대부분 시간은 영광보다는 아쉬움과 빈약함으로 기억되고는 했습니다.
게다가 인천에서 프로야구를 소비할 계층의 사람들은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요. ‘외지인의 도시’ 인천에는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만큼이나 충청에서, 호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영호남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지역감정과 맞물려, 인천의 야구팀은 인천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고향의 팀을, 부모님의 고향의 팀을 선택했습니다. 숭의야구장의 청보 핀토스나 태평양 돌핀스를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3루를 채운 홈 팬만큼이나 1루를 메운 빙그레 이글스나 해태 타이거즈의 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옛 숭의야구장의 경기 모습.
인천시민들은 세대에 걸쳐 야구의 문화와 기억을 공유하기 어려운 역사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출처: KBSn스포츠 “인천 야구의 기억” 중. 동영상 바로가기▶ )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을 거듭하던 90년대 후반에도 연간 관중 50만 명을 넘지 못하던 스몰마켓 인천에서의 2012년 100만 관중 동원은 단순히 한 야구단을 운영하는 그룹의 성공으로 보기엔 더 많은 함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더스의 선수들을 잔뜩 데려다가 갑자기 인천 야구팀이 되었던 SK 와이번스는 어느덧 인천에 있던 그 어느 야구단보다도 오래 인천에 자리 잡은 야구팀이 되었습니다. 2008년 이후 야구 관중의 계층이 다양화되고 젊은 층과 여성 관중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인천에 옮겨와 산 외지인들의 인천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나의 팀’으로 인천의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인천은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25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도시인들 다수의 사랑을 받는 ‘프랜차이즈 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983년과 다른 것은 지역사회에 프로야구단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프로야구의 문화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이 자신의 팀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SK 와이번스는 프로야구계의 조정에 의해서 인천에 이식된 팀이었기에,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도시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것은 실은 마케팅의 결과물이지만, 인천의 대중문화의 한 켜를 두텁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들입니다. 지역 연고 선수를 영입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 다양한 기부를 하는 등이 있겠지만,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도 이런 융화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홈런이 나오면 울리는 뱃고동 소리나, 초대형 전광판 위에 장식된 인천의 랜드마크들이 인천의 이미지를 환기시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응원 문화가 자리 잡았음에도 꾸준히 불리는 응원가 ‘연안부두’는 기성세대와 젊은 야구팬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응원 구호인데, 10개 구단 중에 8개 구단이 ‘최강 OO’를 사용하고, LG 트윈스가 ‘무적 LG’를 사용할 때 SK 와이번스는 ‘인천 SK’를 외치지요. 이렇게 함께 ‘인천’을 외치면서, 우리는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을 느낄 때, 이것을 한 스포츠의, 혹은 한 기업의 성공과 실패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우리 도시의 성공과 실패로 인식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됩니다.
인천SK행복드림구장의 빅보드. 전광판 위에 인천의 랜드마크와 상징적 이미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출처 :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
「주어진 인천의 풍경들」(인천문화통신3.0 34호)에서 인천의 지방정부는 공통으로 어떤 인천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천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정체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시가 야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 스포츠의 연고를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모든 지방정부는 프로 스포츠를 지원하면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통해 관람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동일시, 함께 관람하는 지역민들과의 유대감 형성과 같은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환호하거나, 파도타기를 할 때, 경기 후 돌아가면서 응원가를 부를 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할 때와 같이 소소하고 흔한 순간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가를 즐기다가,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인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김은식, 2003,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한겨례출판사.
심은정, 2014, 「제5공화국 시기 프로야구 정책과 국민여가」, 역사연구 26.
유관호,박두용, 2009, 「프로야구·축구 관람객의 연고지 사회인식 요인 분석」, 한국체육정책학회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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