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현
황경현은 사회구조 안에서 마주하는 대상과 사건을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해 재구성하여 동시대의 풍경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주요 작업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고립과 유랑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군상을 모티브로 한 <역마>, SNS에서 발견한 여러 현상과 미술계의 부조리를 엮어 가상의 홍보영상으로 제작한 <지라스: 찌라시>, 도시의 유흥 장소를 전시공간으로 가져와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로 재구성한 <노래방 프로젝트>, 자전적으로 추출한 이미지의 파편들을 공간에 재구성한 <방주> 등이 있다.
드로잉(역마), Drawing(stroller), 40×103cm, conte on paper, 2016
드로잉(역마), Drawing(stroller), 150×300cm, conte on paper, 2015
드로잉(역마), Drawing(stroller), 150×240cm, conte on paper, 2017
황경현의 <역마>시리즈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고립과 유랑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군상을 모티브로 한 작업이다. <Drawing(stroller)>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산책(목적 없는 보행)’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보를레르가 선취했던 ‘산책자(Flàneur)’의 시선을 투영한다. 작가는 <역마> 시리즈에서 ‘21세기의 산책자(Flàneur)’가 되어, 현대의 풍경을 해석한다. 콩테(conté)를 사용해 연출한 흑백 풍경은 장소성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배제하여, ‘익명성(anonymity)’을 드러냄과 동시에, 종이 위에 완전히 고착되지 않고 겉도는 재료의 특성을 통해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군상을 은유한다.
드로잉(아치형태 드로잉), Drawing(Arch), 150×600cm, conte on paper, 2016
드로잉(‘ㄴ‘자 드로잉), Drawing(L-Shape), 800×150cm, conte on paper, 2017
Installation view at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ㄴ자 드로잉(L-Shape)>은 형식적 탐미주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가장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보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2차원(환영) 이미지에 둘러싸인 동시대적 환경에서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고, 관객은 어떤 그림을 봐야 할까?’ 작가는 회화를 벽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ㄴ형태로 설치하여 관람객이 작품을 밟거나 바닥에서 벽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게 하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관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회화의 존재 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방주, Ark, 330×550×191.5cm, space installation, 2016
Installation view at Gyeonggi Creation Center
평(㎡), Squaremeter(㎡), 330×330cm, space installation, 2017
Installation view at AramNuri Arts Center
지라스(散らす), Scatter, 12:00, video Installation, 2016
Drawing XXX, Slang Market Project, 2017
황경현은 지난 6월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속어들을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집하고 심사를 통해 매입하는 <비속어 매입공고>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에서 작품 및 굿즈 판매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하여 <Drawing xxx>를 진행했다. <Drawing xxx>에서는 매입된 비속어들을 프로젝트에 참여한 5명의 심사위원과 함께 작품으로 재가공하여 이를 관람객에 재판매했다. <비속어 매입공고>는 작가가 어느 미술기관의 ‘소장품 매입’ 시스템을 차용한 프로젝트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비를 근간으로 한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한계를 실험해 보고자 한다.
작가노트
얇은 막에 반복적으로 ‘그리는 일’은 표면에서부터 좀 더 안쪽 세계로 접근하기도 하고, 바깥으로 나오기도 하며, 구현된 세계의 안과 밖의 경계를 오간다. 이러한 행위 중에 중요한 것은 검은 입자들이 있을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특히 모르는 부분에 대해 처리를 할 때 가장 집중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파노라마 사진을 찍으며, 기계가 시공간의 뒤틀림을 ‘검정’상태로 출력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곳을 모르니까 상상해서 채우거나 검게 칠 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때때로 예술과 무관해 보인다. 무수한 다차원의 공간을 어떻게 얇은 막에 끼워 넣을까? 혹자는 평면에 싸인 물감 덩어리들을 현실과 연관 짓는 것은 눈속임일 뿐이라고 못 박기도 한다. 회화는 그려낸 화면을 통해 어떠한 사건을 소환하거나, 미지에 놓이게 만들며, 노동성(정신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혹은 ‘회화’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으로서의 ‘회화’를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회화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실은 이 모든 과정들은 예술이 현실 속에서 어떠한 유효성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 대한 논쟁이었다. 예술의 ‘선구적 역할’에 대한 논쟁에서 회화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는데, 실상 즉시성의 오늘날 어떤 미술이 그 자체로 ‘선구적’일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소환하여, 그것을 통해 미래가 아닌, 또 다른 동시대를 복제해내거나 재창출하는 현장을 목격하면, 이렇게 개개인이 각자의 다른 시공을 만들고 살아가는 동시대에서 회화의 유효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당장의 ‘그림 그리기’에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거대한 스크린 앞에 웅크려 앉아 무엇을 할 수 있을까?